요시다 쇼인의 생애
요시다 쇼인의 출신은 하급 무사 집안이에요. 그의 청년 시절,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웃 국가인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전쟁에서 패해 굴욕을 겪고 있었어요. 이를 직접 지켜본 요시다 쇼인은 동아시아의 학문으로는 서양 국가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크게 깨닫고 서양의 기술과 학문을 배워나가야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소속인 조슈번은 막부 정치에 크게 관여하여 중앙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이에 요시다 쇼인 또한 큰 영향을 받았어요. 그는 20살이 됐을 무렵 규슈를 떠나 일본 열도를 여행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견문을 넓어가며 그 당시 막부가 자리한 에도에서는 유명한 사상가인 사쿠마 쇼잔을 만나뵙기도 하였답니다.
그의 사상으로는 일군만민론과 정한론이 대표적인데 그의 사상은 훗날 존왕양이파, 왕을 섬기고 서양을 배척하자고 주장하는 세력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답니다. 일군만민론과 정한론은 다음 단락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군만민론
일군만민론은 세상을 천황이 지배하고, 나머지 백성들, 즉 만민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뜻하는 것이였어요. 당시의 일본 정치 체제를 생각하면 상상도 하지못할 급진적인 사상이라고 볼 수 있어요. 왜냐면 당시 일본은 교토에는 천항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오래전부터 천황은 상징적인 역할만 하고 있고 실권은 전혀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어요. 현재 도쿄에 해당되는 에도에 위치한 에도 막부의 쇼군이 실권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답니다. 그러나 일군만민론이라는 사상에 따르면 막부를 자칫 인정하지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답니다. 이러한 일군만민론의 이념에 따라 요시다 쇼인은 사람들의 신분에 구별을 두지 않았어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도 출신이 낮은 사람이였는데 요시다 쇼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한론
정한론은 요시다쇼인이 1854년 당시 서양 세력이 자신의 조국인 일본을 넘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필리핀부터 시베리아까지 이르는 범위의 지역을 미리 장악해두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에 관해서는 과거의 한반도 국가들은 일본의 속국에 포함되었기에 다시 그들을 일본의 품으로 복속시켜야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에서 보낸 조선 통신사도 일본 내부에서는 조공 사절로 선전하여 한반도에 위치한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서 선전하고자 하였으며 대등한 위치에 있는 국가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서양 세력들과 불평등 조약에서 입은 손해를 동아시아 이웃국가들을 통해 만해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근대화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한론은 훗날 일본의 군국주의 (제국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884년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그 이후부터는 친조선 성향을 띄던 인사들 사이에서도 정한론이 대두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사법권과 외교권 등을 빼앗기게 되고 이후 군대 해산 이후 1910년에는 일본에게 흡수합병에 당하기에 이르게 됩니다.